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존재성을 전면에 내세운 첫 소설집
‘여자 어른’으로서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 중 절반가량이 할머니의 손에 길러지는 현실에서 우리의 할머니들은 관절염과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된 양육비를 받지 못하면서도 중노동에 가까운 ‘두 번째 육아’를 묵묵히 감내하고 있다. 남편에게도 가정에서의 동등한 권위를 (아마도) 인정받지 못했을, 또 (다분히) 사회적으로도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을 우리의 할머니들은 왜 여전히 인생을 충실히 살아낸 어른으로서 대접받지 못하는 걸까?
이 책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존재성을 전면에 내세운 첫 소설집이다. 2019년 김승옥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윤성희의 「어제 꾼 꿈」은 남편의 제삿날에도 연락하지 않는 자식들에게 서운해하면서도, “손주가 태어나면 구연동화를 해주는” 좋은 할머니가 되기를 빌어보는 화자의 주문을 생생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2020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백수린의 「흑설탕 캔디」는 젊을 적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인생을 하나의 특별한 서사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믿었”지만, 결국엔 “낯선 섬에 홀로 표착한 것 같았던” 할머니의 고독과 외로움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으로 치환해낸다.
2020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강화길의 최신작 「선베드」는 요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찾은 손녀 ‘나’와 ‘나’의 친구 명주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혼자 남을” 손녀를 걱정하지만, 결국 치매에 걸려 “손녀를 완전히 잊어가게” 될 할머니의 무해한 사랑을 절제된 장면과 구성으로 속도감 있게 그려낸다.
젊은작가상 최다 수상자인 손보미의 「위대한 유산」은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어마어마하게 큰 집”을 처분하려고 10년 만에 돌아온 ‘나’가 어릴 적 이 집에서 가정부로 일했던 아주머니와 조우하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섬세한 심리묘사와 긴장감 있는 전개로 추적한다.
2018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최은미의 「11월행」은 11월의 어느 주말, 수덕사로 템플스테이를 하러 간 여자들의 이야기로 “오랫동안 지녀온 무언가를 (……) 영영 두고 오게” 되는 화자를 통해 시간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밀도 높은 문장으로 되묻는다.
25만 부 베스트셀러이자 아시아권 소설로는 최초로 일본 서점대상을 수상한 『아몬드』의 작가 손원평의 「아리아드네 정원」은 “아리아드네 정원”이라는 우아한 이름을 가지고도 그저 “늙은 여자”로서 ‘유닛 D’에 거주해야 하는 주인공을 통해 근미래의 노인 문제, 세대 갈등, 이민자 문제 등을 SF적 상상력으로 첨예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자 어른의 이야기
문학평론가 황예인은 “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과거와의 연결이면서 우리의 미래를 알아차리는 과정이 되기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좌충우돌하며 성장하는 어린 여성들, 연대의 힘을 깨닫고 용감해진 성숙한 여성들. 여기에 나이 든 여성들을 함께 놓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이전보다 선명해진 할머니라는 존재가 서로 간의 이해와 소통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줄 것이라는 점이다. 소설가 오정희 역시 이 작품들이 “노년에 대한 통념과 편견을 깨뜨리고 섣부른 달관과 체념과 화해라는 해결책을 거절하면서 대신 삶의 불가해함과 인간 존재라는 신비를, 한세상을 건너가면서 겪고 감당했던 그 모든 것들의 곰삭은 향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라고 추천의 글을 통해 밝혔다.
팍팍한 현실을 홀로 감내하며 살다가도 어쩐지 울컥해질 때, 거칠고 말랐지만 따뜻했던 두 손을 부여잡고 싶을 때, 이미 어른이지만 아직 미성숙하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우물쭈물하며 삶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려는 당신에게 이 책은 반짝이는 이정표이자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경이로운 위로를 건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