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블랙리스트’ 문화ㆍ예술인 82명을 이른바 ‘온건 좌파’와 ‘강성 좌파’로 분류해 ‘맞춤형 압박’을 가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를 검찰이 입수했다.
검찰 관계자는 28일 “국정원 적폐청산 TF로부터 건네받은 자료를 보면 당시 국정원이 ‘온건 좌파’에겐 보수 포섭을 목적으로 한 회유책을, ‘강성 좌파’에겐 노선 포기를 유도하기 위해 직·간접적인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등 채찍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검찰이 지난 14일 국정원 적폐청산 TF로부터 건네받은 ‘블랙리스트’에는 82명의 연예인 이름이 적혀 있다. 원세훈 원장이 재임 초기(2009년 7월) 지시해 ‘좌파 연예인 대응 TF’가 작성한 것이다. 당시 국정원은 이들의 진보 성향을 따진 뒤 두 부류로 나눠 관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배우 김가연ㆍ김규리ㆍ유준상ㆍ이준기, 가수 김장훈ㆍ양희은ㆍ이수ㆍ이하늘, 방송인 김구라ㆍ김제동ㆍ박미선ㆍ배칠수ㆍ황현희 등 13명이 비교적 좌파 성향이 덜한 ‘온건 좌파’로 분류됐다. 배우 문성근ㆍ권해효ㆍ명계남, 가수 신해철ㆍ윤도현, 방송인 김미화 등 69명은 ‘강성 좌파’로 구분됐다.
국정원에게 온건 성향 연예인들은 포섭 대상이었다. 검찰이 입수한 관련 문건에는 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회유할지 계획이 적혀 있었다. “공익광고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준다” “‘건전 연예인’들과 함께 출연하게 해서 방송활동에 전념하게끔 한다” “연예활동에만 충실하도록 유도하라” 등이다. ‘건전 연예인’은 국정원이 보수 성향으로 판단한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연예인들로 짐작된다.
‘온건 좌파’에 적힌 피해자들은 “내가 정권 눈 밖에 났고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들어와 의아해하기도 했다”, “마치 국정원 말을 잘 들으면 먹고 살 걸 만들어준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는 입장을 털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국정원은 ‘강성 좌파’ 연예인들에겐 ‘채찍’을 들었다. 이들의 지인들을 통해 직ㆍ간접적으로 경고 메시지를 전하거나 일감이 끊기도록 압력을 가했다. 배우 A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처음에는 내 능력이 부족하거나 내가 뭔가 잘못을 해서 그런(출연 섭외가 끊긴) 줄 알았다”고 증언했다.
트위터를 통해 정부 비판 글을 주기적으로 올렸던 B씨는 검찰에 “지인이 찾아와 글을 내려야 한다”며 “‘그러다 큰일난다. 당신이 하는 일이 잘못 될 수 있고 당신도 큰일 날 수 있다’는 말을 수차례 전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표면적으로는 걱정해주는 것 같았지만 경고의 의미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덜컥 겁이 나 글을 내린 적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검찰 등에 따르면 B씨가 지목한 ‘지인’은 국정원이 출연 등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화이트리스트 연예인’으로 조사됐다.
국정원은 방송인 김제동 씨에겐 아예 전담 마크맨을 붙였다. 김씨는 ‘온건 좌파’로 분류돼 있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2009년 5월) 노제 사전 행사를 진행해 ‘특별 관리 대상’이 된 경우로 조사됐다. 김씨는 이듬해엔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도식에서 사회를 맡기도 했다. 김씨는 지난 23일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2010년 당시 국정원 직원이 찾아왔었다”며 “‘VIP(이명박 대통령)가 걱정이 많아 그런데 노 전 대통령 추도식에 안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요구를 받았다”고 말했다. 검찰은 김씨와 피해자 조사 일정을 협의 중이다.